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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그리고 돈과 행운을 잡는 비법

진정한 사랑은 이성(理性)의 향기(香氣)가 난다

힐링아재 2022. 1. 24. 11:57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좋아하는 것을 사랑으로 오인하고 있다. 국어 사전의 세째 항에도 일정한 대상을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했을 정도이다. 또한 심리학자들조차도 인간은 사랑의 욕망을 지닌 존재라고까지 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감정적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다만 욕구의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 그리고 욕망의 상태는 어디까지나 감정일 뿐이다. 

 

흔한 말로 좋아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이다. 그러나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그것에 대한 뚜렷한 증거로서 고양이나 사자의 예를 들어보자. 고양이는 쥐를 보면 좋아한다. 사자 또한 얼룩말을 보면 좋아한다. 그것은 쥐의 모습이 귀엽거나 얼룩말의 무늬가 아름다와서가 아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붉은 피와 고깃덩어리가 좋아서이다. 쥐를 발견한 고양이는 기분이 좋아서 어두웠던 표정이 금방 밝아진다. 또한 얼룩말을 발견한 사자는 눈가에 잔잔한 미소가 흐를 정도로 상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랑의 표정이라 말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기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대상을 통하여 의지하려고 하는 일종의 도둑 행위인 것이다. 이기적이란 곧 자기중심을 말하는 것이며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핵은 본능인 것이다.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위해서 상대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행위가 바로 좋아하는 감정의 결과인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것은 자신의 이득만 생각할 뿐이지 그럼으로써 피해를 보는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심을 이루고 있는 본능은 상대를 느끼지 못하고 오직 본능 자체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이혼율이 급증한다고 하며 특히 물질문명이 발달된 나라에서는 아예 예사처럼 되어 있다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본능의 감정에 치우쳐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서 결혼하고 싫어서 헤어진다고 하는 단세포적인 행위가 이성적 인간에 의해서 행하여진다고 하는 것은 반이성적이며 반인간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감정이란 항상 본능을 바탕으로 하여 편견적이다. 그러므로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싫어한다는 반대급부적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본능은 생리적 욕구의 매체로서 항상 어느 대상을 잡아 끌어들이고 빼앗아 섭취시키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즉, 잡아당길 때 그 물체는 잡아당기는 쪽으로 기우는데 그 상태가 편견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다가 잡아당긴 것을 팽개치면 반대쪽으로 기울거나 쓰러져버리는 것이다. 잡아당길 때가 좋아하는 상태라면 싫어하는 때는 팽개치는 상태이다. 즉 좋아서 만날 때와 싫어서 뿔뿔이 헤어지는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비유하여 불교의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즉, 좋아하는 감정적인 사랑은 좋아한 것에 대한 행위에 대하여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반대급부적으로 미움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보상을 받고 의지하려고 하는 대상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의지할 곳이 없어 괴롭다는 이야기이다. 즉, 중심력이 없으니 안절부절 못한 데서 나오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어서 법구경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사랑을 일부러 만들지 말라.

사랑은 모든 고통과 구속의 원인이 된다.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을 떠나면, 모든 구속과 걱정이 없다.

 

즉, 갈등과 증오를 낳는다는 것은 자기의 소모이며 파괴이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적인 사랑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욕망은 어느 대상을 자기에게 채우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둑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노예인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에 의해서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감정적 변화는 타에 의해서 조종되는 것이므로 노예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노예는 비굴하다. 왜냐하면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갖은 거짓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만하다. 그것은 비굴이 반대급부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만이기 때문이다. 즉, 비굴한 상태에서 만나고 교만한 상태에서 헤어지는 것이 감정적 사랑의 실상이다. 비록 헤어지지 않은 상태라 할지라도 비굴과 교만이 교차되는 번뇌 속에서 감정적 도피처를 찾기에 급급한 것이 타락적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성(理性)적 사랑은 주체적 사랑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영원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자기 중심이 될 수가 없고 전체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성이란 글자 그대로 진리를 지닌 성품이다. 즉 현상적 진리를 바탕으로 하여 그것이 지닌 역할성을 목적적 진리로 하고 그것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시켜 완성화한 완성성 그 자체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변하지를 않는다. 

 

예를 들어서 이성이 우주라 한다면 객체인 감정은 우주 위에서 수시로 변하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이성적인 사랑을 성경에서는 온전한 사랑이라 표현하였고 그것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즉 감정적 사랑은 번뇌를 일으키고 두려움을 낳지만 이성적 사랑은 그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이다. 

 

세계적인 미국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예술]에서 사랑의 특성을 다섯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첫째로는 관심을 가지는 것, 둘째로는 책임을 느끼는 것, 세째로는 존중하는 것, 네번째로는 이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 중복되지 않는 내용이 오래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또한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남의 악행을 기억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즐거워하며 모든 것을 덜어주고 믿으며 또한 참고 견디며 마지막으로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결론적으로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나 성서의 이야기나 궁극적으로는 이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을 지니지 않은 감정적인 상태에서는 이상과 같은 생각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억지로 의식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면이지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찾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이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사랑의 구호는 위선으로서 저항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늘날 온갖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라든가 부정부패의 원흉들을 볼 때 그들이 고린도 전서 13장의 내용을 다 알 수 있는 경력을 지닌 자들이다. 또한 성경을 생활화하는 종교인들 중에서도 온갖 부정이 일어나는 경우를 보더라도 이러한 이치는 역력한 것이다. 시계 소리를 듣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욱 들리듯이 이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간단한 지식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본능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본능을 담고 있는 육체는 변하고 없어진다. 따라서 감정도 변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이성은 물체가 아니기에 변하지도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성적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발췌; 진리의 분석/홍태수/춘추각/1982/p.24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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