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트하르트 툴레라는 사람은 현대의 영적 스승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스물아홉 살의 어느날, 캄캄한 절망의 나락에서 깨달음의 밝은 순간으로 갑작스럽게 솟아올랐던 아름다운 경험을 묘사했습니다. 그의 경험은 과거를 용해시키고 인생행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불교 철학과 여러 명상법 등을 배우고 익히며 열정적인 내면 여행의 시발점이 되었던 그 변화를 이해하고 종합하는 데 깊이 몰두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수십년간 상담자이자 영적 지도자로서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작은 모임들을 이끌어 왔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 사람도 아니고 흘러가버린 과거에 별 가치를 두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서 오늘에 이르렀고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짤막하게나 밝히고자 합니다.
서른 살 무렵까지도 나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걱정과 불안 속에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까마득한 전생의 일처럼 여겨지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았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스물아홉 번째 생일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밤, 나는 절망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느낌 속에서 헤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여느 때보다 강렬했습니다. 밤의 적막 속에서 윤곽만 희부옇게 보이는 방안의 가구들,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낯설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아무 의미도 없었고, 삶 자체가 끔찍스럽기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지긋지긋했던 것은 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이런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단 말인가?' 지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싶은 깊은 갈망이 먹장구름처럼 나를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도대체 나는 왜 이 모양이지?'
그런 생각이 머릿 속에서 계속 맴돌 때 불현듯,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생각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나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하나가 아닌 둘이란 말인가? 내가 나 자신을 견딜 수 없다고 느낀다면, 나는 둘이어야 마땅하다. 평소의 내가 있어야 하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내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진짜 나인 것일까?'
갑작스런 이런 깨우침에 머릿속은 일순 모든 작동을 멈추어 버렸습니다. 의식은 생생했지만,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알 수 없는 에너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속도가 빨라지더군요.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항하지 말라' 라는 목소리가 가슴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나는 텅 빈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 공간은 바깥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안쪽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그냥 아득한 공간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데도 나는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나는 창밖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깨어났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습니다. 나는 아직 눈을 감은 채 찬란한 다이아몬드의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래, 다이아몬드가 소리를 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소리가 날 거야.'
나는 눈을 떴습니다. 새벽의 첫 햇살이 커튼을 통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빛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생각이 아닌 느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커튼을 통해 스며드는 부드러운 빛은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렸습니다. 너무나 익숙한 방이었지만, 언제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방금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싱싱하고 신선했습니다. 연필이나 빈 병 따위를 하나씩 집어들고 들여다보며, 그 활기찬 아름다움에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습니다.
그날 나는 시내를 샅샅이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처럼 지상의 삶 전체가 내 눈에는 온통 기적으로 보였습니다.
그 후 5개월 동안은 흔들림 없는 평화와 기쁨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는 차츰 그 강도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나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내가 이미 품고 있는 본래의 성품에 그 무엇도 더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에게 무언가 의미심장한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아챈 것은 여러 해가 지난 후였습니다. 영혼에 대해 다룬 책들을 읽고, 영적인 교사들과 숱한 밤을 함께 지낸 다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일이 나 자신에게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그날 밤 고통이 극도에 달하자, 나 자신을 불행과 두려움의 대명사처럼 여겼던 '가짜 나'는 고통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모두가 마음이 만들어 내는 허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속아왔지만, 고통이 심해지자 거짓된 나는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순간 지금까지 쌓아 올린 거짓된 성이 일시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내가 나 자신이라고 믿기 이전의 본래 순수한 내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후 나는 애초에 경험했던 공(空)의 상태로, 시간도 없고 죽음도 없는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 깨어 있음으로 해서 충만한 상태에 머무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첫 경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신성의 상태에 머물곤 했습니다.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한때는 직장도, 집도, 사회적인 신분도, 인간관계도 남아 있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거의 2년 동안은 더할 나위 없는 희열에 잠겨 공원 벤치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용;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노혜숙 유영일 역/ 양문/ 2004/ p.15-19 및 책날개 지은이 소개
위 이야기에서 뭔가를 느끼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두가지를 느꼈습니다. 첫번째는 바로 자아의 이중성이라는 점인데요, 이야기의 주인공이 느꼈던 고통 속의 자아는 본래의 자아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뒤바뀌고 새로운 깨달음의 체험을 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심리학에서 자아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자아를 의식적으로 볼 때 그저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으로 어렴풋이 존재한다는 고전적인 심리학적 해석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이라는 것은 실재하며 그것은 우리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고 활동한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최면과 내면아이라는 개념을 말할 수 있겠네요.
최면은 무의식이라는 또다른 자아를 탐구하고 무의식의 뛰어난 재능을 조금 빌어서 쓰는 심리학적 기술입니다. 최면상태에서는 현재의식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엄청난 지적 능력과 에너지가 발휘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또다른 자아인 잠재의식이 거대한 기억의 저장창고이자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잠재의식이라는 또다른 자아는 단순한 에너지 덩어리가 아니라 의지와 생각을 하는 우리와 똑같은 인격체라는 개념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정체성을 가지며 생각도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물질사회에 적응한 현재의식이 느끼는 방식이 아닌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다는 사실을 현대의 심리학은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면아이(Inner child)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불과 몇 십년 전의 일입니다.
위 글의 저자는 바로 이러한 내면의 아이, 내면의 존재를 깨닫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면의 에너지가 현재의 자아를 덮어버리게 되어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써 새로운 자아가 체험하는 것은 모두가 새로울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제가 느낀 두번째는 저자가 신비한 체험을 하는 순간 '저항하지 말라'는 목소리를 들었다는데 있습니다. 지은이는 신비한 경험 즉 깨달음을 체험한 뒤, 다음날부터 모든 것이 새롭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세상에 맞서고 불평불만을 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자아가 되어야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황홀경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태는 물질문명에 찌든 인간의 현재의식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면의 순수한 자아만이 가능한 것이죠. 내면의 자아가 주도권을 쥐게 되므로써 가능해진 것입니다.
세상이 변했다거나 저자의 환경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내면이 변해버림으로써 세상을 느끼고 판단하는 방식이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써 인생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당연히 그가 고통받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저자와 같은 그러한 갑작스런 깨달음의 경험을 하기가 힘든 일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자아와 내면의 자아가 일순간에 뒤바뀌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평생의 수행과 노력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자아라는 것은 본래 하나로 존재했습니다. 단지 사회적인 인간으로 살게 되면서 두가지로 분리된 것일 뿐 원래 우리는 순수한 내면의 아이 그 자체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회적인 자아와 본래의 내면의 자아를 일치시키는 노력을 하는 방법을 찾아 노력을 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하루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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