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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이야기

나를 위로하는 글

힐링아재 2021. 11. 20. 11:18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현실에서 나는 그대로 존재하지만 상황이 달라지는 경우 말입니다. 나 라는 존재, 나의 정체성은 그대로인데 모든 것은 달라져버린 상태가 되는 것. 하늘, 산, 나무, 꽃도 더이상 푸르지 않고 땅과 건물들 조차 메마른 상태로 보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무표정하고.. 무엇보다 이렇게 나만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이런 내가 너무 싫습니다.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습니다.


갑자기 직장을 잃었거나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겼거나 사회가 변했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거나..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나라는 인격체는 그대로 있는데, 세상은 모두 삭막하게 변해버렸습니다. 너무나 무미건조해 보이고.. 나라는 존재로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럽습니다. 버겁습니다. 지난날 푸르렀던 하늘과 구름, 생명의 빛을 반짝이던 아침 이슬 머금은 가로수들, 활기찬 사람들의 행렬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나도 그냥 그렇게 장렬히 사라지는 것들 속에 포함되고 싶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절망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느낌은 일말의 기대나 희망 혹은 누군가 기댈만한 곳이 있다면 절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감 속에서도 말없는 위로와 따뜻함으로 영혼을 감싸주는 시가 있습니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인용;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나태주 엮음/ 엔드/ 2020/ p. 14-15



위의 시는 절망감을 지닌채 그저 고요에 머물러 막차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 먹먹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서로가 같은 입장임을 말없이 느끼고 말없이 위로합니다. 아무런 희망이나 기대없이, 그냥 묵묵하게 막차 시간을 견뎌낼 수 밖에요. 그 외 그 어떤 행동이나 감정도 사치입니다.

과거에 저는 모든 것을 잃다시피 하고 책임을 혼자져야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장 먹고 살 것이 없어 무어라도 해야 했는데, 얼마 후 막차 시간에 쫓기는 야간에 일을 하게 되었고 고된 일을 마치고 귀가를 하려면 막차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택시를 타는 것 조차 사치였습니다.

깊은 밤 추위에 떨며 막차를 기다리는 서글픈 영혼은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막차를 기다리는 곳에는 저와 같은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었습니다. 모두들 눈인사는 커녕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우두커니 서서 혹은 의자의 작은 빈틈을 빌려 앉아 멀리 막차가 오는 인기척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을 교환하지 않아도 비슷한 입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무나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있어 처음에는 좀 낯설었지만 이내 적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아무 말도 없지만 그저 서로 같은 입장임을 이해하고 '말없는 위로'가 한동안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절망감과 함께 느꼈던 말없는 동료애와 위로는 오랜 시간이 지난 아직도 생생합니다. 위의 시는 그런 느낌을 그대로 불러 일으켜주는 것 같습니다. 먹먹한 외로움과 고단함 그리고 말없는 위로.. 시는 그것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